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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다른 곳에 있다./Thailand

Episode 1 : BANGKOK I love you, but you're bringing me down

1.


3년 만이다.

비록 열흘이 채 되지않는 짧은 기간이지만, 여행다운 여행은 실로 오랜만이다.

다만, 너무 오랜만이어서인지 시작부터 참으로 엉망진창이다.

우선은 아무래도 내 잘못이 제일 크다 하겠다.

시간도 없는 주제에 소싯적 배낭여행의 향수에 젖에 '비행기는 무조건 싼걸로 예매' 하는 것이 미덕인냥

덜컥 중국 천진을 경유하여 새벽에 방콕으로 도착하는 항공권을 예약해 버렸던 것이다.

팀장님 앞에서 비장한 목소리로 '이번 휴가는 태국으로 열흘간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의 패기라면

직항으로 예매할 수 도 있었지 않았는가!

어쨌든 천진으로 날아 가기로 한다.




천진 공항에 닿으니 저녁이 다되었고, 밤 10시까지 4시간 가량 공항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것보다 왜,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구입한 비닐로 밀봉된 술이 환승시에 기내 반입이 되지 않는 것인가, 결국 다시 체크인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외롭게 홀로, 1시간 가량을 어두운 체크인 카운터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그전에 체크인은 환승객을 위한 임시 체크인이었다)

가까스로 체크인을 하고 출국장에 들어섰다. 이미 시간은 밥 시간을 훨씬 넘겨버렸다.

출출한 마음에 둘러보니 스낵바에 신라면을 판다길래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신라면을 먹기엔 이제 갓 한국을 떠난자로써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도시남자와 어울리는 핫도그와 스프라이트를 시켰다.

스프라이트를 다 마시도록 핫도그가 나오지 않기에, 어떤 작업(핫도그를 만든 줄 알았다)후에 놀고 있던 직원에게 물었다. 


- 내 핫도그는요?

- ㅇㅇ (깜짝 놀란 그녀의 눈이다.)


부리나케 안으로 달려가더니만 이윽고 무언가 탄내가 새어나온다. (한숨)

냉장고에서 새로이 뭔가를 꺼내더니 다시 덥혀서 가져온다. (기대)

한입 베어 물어봤더니, 빌어먹을, 샌드위치잖아... (한숨)

한숨을 쉬니 기둥 뒤로 도망가버렸던 천진 공항의 매점 아가씨를 뒤로한 채 다시 천진 하늘을 날았다.

도시를 내려다 보니 엄청난 스모그가 내려앉아 너무나도 아름답게 도시의 불빛들을 산란시키고 있었다.

스모그가 가진 유일무이한 장점을 지구 최초로 발견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2.


방콕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2시 쯤이었다.

그런데 왠걸, 천진에서 왔으니 중국인인줄로 아는 건지 도착 비자를 받는 곳으로 가란다.

일단은 갔는데, 아무리 3년만이지만 도착비자는 말도 안된다 싶어 머뭇거리며 보니

얼떨결에 나를 따라온 두명의 대학생 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보인다.

난 그때 그들에게 말을 걸었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말을 하고 함께 카오산까지 택시를 타고 갔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갓 한국을 벗어난 헬조선의 소인배 답게 그들을 뒤로한 채 홀로 입국 수속을 받았다.

입국카드가 동이났고, 누군가에게 빌려 적어갔더니 출국카드가 떨어지고 없는 것이어서 다시 작성해 갔다.

하필 줄이 길어져 버렸고, 막 다음차례를 기다리던 외국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맨앞으로 가서 도장을 받았다.

(다행히 애초에 내 바로 뒤에 있던 애들 이었다)

힘들다. 짐을 찾고 나니 시간은 3시 반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녀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5시면 공항 버스가 다니겠지 하는 생각에 정처없이 기다리다 보니 공항버스는 없어진지 오래인 것 같고, 

택시를 타자니 곧 첫 공항철도가 다닐 시간이라 하릴없이 환전을 하고 심카드를 사서 끼웠다.

힘들다. 카오산까지 오는데 14시간이 걸렸다. 아침 7시 카오산 도착.



3.


3년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변하게 한다.

놀라운 것은 카오산 거리가 변한 것 보다, 내 삶이 변하고, 기억이 왜곡되며, 추억이 사라지는 것이 그 변화의 8할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3년동안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회사만 다녔다. 아니, 회사가 나를 다녔다. 

3년간 내가 쌓아올린 숫자는 내가 꽤나 성공한 사람인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었지만,

그것들은 결국 허수, 주먹에 쥔 모래처럼, 숫자의 대부분은 내가 원치않는 정부의 세금으로, 기약없이 암이 걸리기만 기다리는 보험금으로, 

친구의 부탁으로 가입한 손해가 뻔한 펀드상품으로 새어나갔다.

약간의 심리적인 풍족함과 더불어 약간의 멍청함, 그리고 전멸하는 인간관계보다 더 힘든것은

나를 지배하는, 회사빼고 전분야에 걸쳐 엄청난 무**이 무기인, 상사들과 

그리스, 로마, 중세시대 어느 노예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한국의 노예 조직 문화였다.

일이란 자고로 빨리빨리 하면서, 실수없이 정확하게 하면서, 남들보다 많이 해야하고, 

매일 저녁 술잔을 기울일 줄 알아야하지만, 절대 취해서 정신을 잃어서는 안되고, 다음날 지각해서도 아니되며,

나를 처음 만나서 어색해하는 선배님 및 상사님들이 어색해하지 않게 내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고 재롱도 떨어야 하며,

회사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20년 다닌 상사들은 회사가 죽으라고 하면 진짜 죽어야 하니까.


- 노 베이컨시?

- 클로즈드!


3년간의 변화의 나머지 2할, 동대문 도미토리가 문을 닫았다. 

그것도 하필 내가 아침 9시까지 기다리며 체크인을 물어본 그날 아침에.

분명 사람들은 자고 있는데, 문을 닫았다고 나를 쫓아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건물주가 임대료를 너무 높게 올려서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것도 내가 도착한 그날 아침에.

이곳 카오산도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지배하고 있었다.



4.


뚱뚱한 아저씨가 흰색 런닝을 입고 나와서는 내게 말을 건다.


- 한국분이세요?

- 네

- 저희도 이따 다 나갈건데, 저기 람부뜨리 나가면, 큰 대로변에 동해라고 한국 여행사 있고, 도리토리 있어요, 거기 가보세요


굳이 도미토리로 가지 않고, 타라 하우스로 갔어도 됐는데, 그땐 미처 생각치도 못했다.

동해 여행사 옆에 있는 도미토리를 찾아 체크인을 하려는데, 1층 침대는 없다하여, 12시까지 기다리겠냐 하길래, 우선은 그러겠다 했건만

간밤에 너무 피곤했던지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2층 침대에 체크인하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내 등을 뜯어먹었다.

가려움은 저녁이 되어야 나타났다. 다음날 아침 내 등을 본 사람들이 배드벅 때문인줄 알고 도미토리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한 아저씨는 바로 짐을 싸서 나갔다.

여행이 끝날 쯤에야 원인을 알게되었지만, 가방에 넣어둔 기내식으로 나온 빵때문에 개미들이 모여들었고, 

내 등을 빵인지 확인하려고 뜯다보니 생각보다 단백질이 풍부해서인지, 내 등에서 김치 맛이 나서 한번 맛보니 멈출수 없었던지, 

어쨌든 누가봐도 징그러울 만큼 무자비하게 난도질을 해놓았던 것이다.

한국에선 겨울만 되면 건조증 때문에 피부가 엉망인데, 힐링차 태국을 찾았건만, 개미때문에 이번에도 내 피부는 편한 날이 없다.



5.


그날 저녁 태국 친구들을 만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전날이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인지, 다들 오늘은 힘들다고 한다.

준비해온 술과 담배가 처량해졌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Ploy 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자기는 시간이 된다기에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우리가 찾은 곳은 고급 음식점이었다. 강을 바라보면서, 라이브 밴드의 연주를 들으면서, 고상하게 식사하는 고급 타이 음식점이었다.

태국에서 비싸게 먹어봐야 수끼나 먹을 줄 알았지, 쏨땀을 이런 곳에서 먹으니... 무지 매웠다. 너무 매웠다. 

매워서 못 먹겠는데 Ploy는 남기면 안된다는 소리는 왜 해가지고 어리숙한 외국인 물 맥주 먹이나.





쏨땀 뿌 마 (참게가 들어간 파파야 샐러드), (소고기 탕), (생선 튀김). 

그리고 싱하(맥주)를 시켰다. 정확한 음식 이름은 까먹었다. 나는 항상 기록에 서툴다. 여행도, 식사도,  만남도.

순간을 온전히 즐기자는 마음이지만, 항상 돌아서서 추억하면 아쉬운게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만큼은 예의 한국인의 전통적인 식사예절로 손꼽히는 음식사진 찍기를 잘 실천하고자 했다.

가격도 엄첨 나왔는데 까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설사가 나왔다.

설사는 한국에 도착해서 마침 한국에 놀러온 제라드와 제주 삼겹살을 먹고나자 뚝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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