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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hole

배설의 시작

   무언가 시작만 한다면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이미 사춘기 무렵 모든것들이 내 손을 벗어나고 있을 때부터 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의 사춘기는 고등학교 입학과 시작되지 않았나 싶은데 고향을 등지고 타지에서의 유학생활과 그 전부터 언제나 느끼던 외로움 덕분이었지 싶다. 나는 홀로 외로움을 달래는 법을 배워야 했고, 이제 더이상 내 모든 거짓과 위선과 망나니 짓을 학교성적으로 방패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딴에는 들어가기 힘든 고등학교를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를 해보았지만 역시나 수재들만 모이는 학교라 그런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식의 변명을 부모님께 말씀드린 적도 없지만, 나는 그런 변명을 말할 필요도 없이, 언젠가 편지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조그맣게 나의 이러한 걱정거리를 적어 집으로 보냈지 않나 싶은 착각에 빠질정도로 나와 부모님 사이에는 나의 지지부진한 학교 생활에 대한 이상한 변명거리가 악취처럼 맴돌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미니카셋트를 사달라고 조르기는 커녕 왠지 학교생활에 여러모로 필요할 것 같고, 고등학생 정도면 모두들 갖고 있는게 이 학교, 이 도시의 현실이다라는 뉘앙스의 조심스러운 말 몇마디 만으로도 최고급 사양의 미니 카셋트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모아온 몇 안되는 카셋트 테잎을 모아 기숙사에 가져다 놓고, 아 역시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지 않나 하는 생각에 학교 앞 레코드가게를 종종 들려 이것저것 둘러보곤 했다. 내가 처음 1년간 생활했던 학교 기숙사는 학교 건물 뒷편에 위치한 두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든 걸 다 제쳐두고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악명높은 학생부장이 기숙사 사감이었다는 것이었다. 동네 깡패를 2층 건물인가 몇 층 건물 옥상에 몰아놓고선 뛰어내릴래, 이걸로 맞을래 라는 조건을 내걸고선 뛰어내리지 않는 걸 보고는 단숨에 자전거 체인을 몇 차례 휘두르자 깡패들이 뒤도 안돌아보고 건물옥상에서 뛰어내려 줄행랑을 쳤다는 소문은 입학과 동시에 자질구레한 교칙따위와 함께 자연스레 듣게 되는 찐줄이라는 별명이 왜 생겼나에 대한 시초였다. 엄격한 기숙사의 통제는 주말까지 이어지고 2주에 한번가량 토요일 오후 점심식사 후에 인원점검까지 마친 뒤에야 각자 집으로의 1박 2일간의 외박이 주어졌다. 그것은 당시 나의 가장 큰 행복 중 하나였으며, 반대로 외박을 마치고 일요일 저녁에 학교로 상경하는 기분은 죽어서 지옥문으로 걸어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토요일 오후 외박을 나와 처음 향하게 되는 곳은 당연히 버스 터미널이었다. 최대한 이른 시간의 시외버스를 타고 이 도시를 벗어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지상 최대의 임무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중간 경유 터미널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아이 때문이었다. 이른 시간의 버스를 탔다가 우연찮게 만난 적이 있던지라 계속해서 그 이른 시간의 버스를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 우연찮은 만남도 단지 안녕, 하는 인삿말만 주고받는 것으로 끝난게 전부 였지만, 내 비정상적인 머릿 속에서는 이미 갈 때까지 다 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친한편은 아니었으나 좋아하던 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누군가에게 얘기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상식밖의 일이 었으며, 항상 자기 맘에 드는 아이의 이름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내 여동생은 그런 나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진보적인 신세대 혹은 상식도 없는 계집, 과연 이 두 정의 사이를 오락가락 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향에 도착에 10분을 더 걸어 골목을 들어가면 우리 집이 나온다. 녹슨 녹색의 대문은 아무리 소리나지 않게 열려고 해도 항상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끼익 하는 비명을 질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