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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다른 곳에 있다./Perth

Perth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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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는 더운 도시이다.

내가 도착한 4월 초[각주:1], 곧 우기가 시작 될 테니 서둘러 오라는 A형의 조언이 무색하게도 퍼스의 4월 날씨는 화창함, 메마름, 더위로 그 넓디 넓은 대륙을 뒤덮고 있었다.

A형의 도움을 받아 방도 아닌, 거실도 아닌 애매한 곳[각주:2]을 잠자리로 마련하게 되었고, 그 곳의 넓이는 호주 대륙의 광활함일까, 혼자 남게된 내가 느끼는 외로움일까 하는 고민 보다 과연 이 사람들과 같이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첫날 밤을 보냈다.

'이 사람들' 이란 정확히 말해서 당시 나보다 먼저 방을 잡고 지내던 사람들 세명과 주인네 자매[각주:3] 이렇게 다섯명을 말하는데, 가장 재밌는 사람은 단연 S형일 것이다. S형은 나보다 약 1달 앞서 이 집에 자리를 잡았다는데, 첫 인사부터 첫날의 마지막 대화 때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기분이 좋지 않다는 뉘앙스를 끊임없이 나에게 표현하려 했고, 급기야 아, 저보다 나이가 어리세요?, 너도 고생 좀 하겠구나, 선배로서 하는 말 깊이 잘 새겨 들어, 너도 내가 봤을땐 아마 일자리 못 구할텐데, 학원이라도 다녀보지 그래?, 아이고, 그나저나 내가 무슨 니 걱정이냐, 내 걱정도 한 가득인데.

라는 일반인에게 들었더라면 굉장히 기분 나빴을 일방적인 대화였는데, S형은 그 모든 기분나쁨을 '서울말에 대한 갈망 끝에 S형 나름 연구해 개발해낸 자신만의 억양과 발음'으로 상쇄시키고는 나로 하여금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만들었다.

차마, 옥동자를 닮은 외모에 숨길 수 없는 경상도 억양을 '독자개발한 신 서울말씨'로 포장해 듣는 이 모두를 웃게 만든다는 표현은... 쓰면안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S형의 솔직함 덕에 '신 서울말씨'의 탄생비화를 알게 된 후론 그에 대한 그 어떤 조롱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S형이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어 취업을 나가 겪게 된 일들과 그로인해 거울을 앞에 두고 거듭된 훈련 뒤 얻어진 노력의 결실이 '신 서울말' 이었기에 나는 S형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다른 방에 지내던 K양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K양은 주인 자매를 고모라 부르는 고등학생이었다. K양과 친해진 계기도 S형 덕분이었으니 다시한번 S형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뜻하지 않게 뜻하지 않은 사람을 이렇게 두번씩 인정하는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곳에 내가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K양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함께 슈퍼에 장도 보러가고, 밤마다 조깅도 했으며, 조깅이 끝나면 집 밖에서 몰래 셋이서 담배를 태우기도 했다.

물론 담배는 청소년이 피울 수 없기때문에 너는 피울 수 없다 라는 경고를 나의 작고 강한 눈빛에 담아 날렸지만... 왠지 그때만은 몰래 매점 뒤에 숨어 친구들과 모여 담배를 피던 고등학교 시절 추억에 잠길 수 있다라기 보단-나는 군입대를 앞두고 담배를 배웠다-, 그런 불량한 아이들의 불량한 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었다.




 

  1. 17. 4. 2009 퍼스 도착. [본문으로]
  2. 게임룸이라 부르던 곳 [본문으로]
  3. 자매 중 언니는 A형 애인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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