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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다른 곳에 있다./Perth

Perth - 3

집에 머무는 날이 많았던 초기에는 퍼스의 낮이 너무도 조용하게 대지를 달구어 놓는 것이 그리 밉지는 않았다.
분명 사람이 사는 동네인데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다. 이 얼마만에 느껴보는 조용함인가.
초등학교 시절 낮에 잠시 큰일을 보러 집에 들릴 때 홀로 길을 걸으며 느꼈던 그 조용함. 학교를 오가는데 학생이 아무도 없다는 그 익숙한 배경 속 낯선 광경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내 왼편을 고요히 따르던 양지바른 담벼락과 함께 남아있다.

4월 퍼스의 밤은 언제나 여름의 바람과 빛깔과 내음과 울림으로 나를 편하게 만든다.
집 앞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굉음이 가볍게 날아들고 낮에 한껏 열을 받아 달궈진 땅에선 아직도 미열이 느껴진다.
인간이 대륙과 부벼대며 만들어내는 치찰음이 잦아들고, 하루 내 저 뜨겁던 태양이라는 백열등이 슬그머니 꺼져갈때
우리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며 시덥잖은 잡담으로 서로를 달래기 시작한다.

그날도 어김없이 기타모임 사람들과 낮 부터 맥주를 사다 놓고 저녁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나는 어느새 단 몇번의 만남만으로 그들과 형 동생, 누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고, 이 무리속에 벌써 떠나보낼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 문 누나는 불과 2주 정도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기에 그냥 저냥 싸게 타고 다니던 뒷문이 고장난 흰색 웨건을 팔기 전에 우리들을 실컷 태워주었다. 근처 마트에서 맥주를 살때도, 옆집에 순돌이를 불러올때도...그리고 그날은 문 누나의 친구 경을 데리러 간다기에 우리는 경을 위한 딱 한자리만 남긴채 꾸역꾸역 자리를 채워 밤길을 달리게 되었다.

나는 경을 본적이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화속에 등장하곤 하던 경 이라는 인물이 누구일까, 문 누나는 경을 '우리 경,사랑스러운 경'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길 좋아했고, 그래서 나는 경 이 문 누나의 남자친구이겠거니 했었다. 경은 킹스파크 내에 레스토랑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우리는 한적해진 시내를 가로질러 킹스파크로 향했고, 가로등 대신 큰 나무들이 도로옆을 지나기 시작했다. 차를 멈춘곳은 가로등이 밝지 않았고, 신이 형이 오줌이 마렵다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사라지자 멀리서 누군가 다가왔다.
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키큰 사람. 다들 차에 타고 인사가 시작되었다. 안경을 썼고, 목까지 덮는 머리는 그다지 길다고 보기 어려웠고, 키가 너무 커서 앞자리에 앉아 다리를 웅크려야만 했던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문 누나네 집에 도착해서 테이블에 앉은 뒤에야 그가 아니, 그녀였음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남자치곤 피부가 너무 좋다 했어... 우리가 동갑이라는 공통점으로 쉽게 말을 텄고, 농담도 능히 주고 받게 되었는데, 이 쯤에서 호주 맥주의 특별한 사회화 기능 첨가에 대해 경외와 고마움을 전해본다. 호주 맥주만 마시면 나같은 사회 부적응자도 사회화가 되어 누구와도 다 재밌는 대화가 가능해지니 이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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